Project Moon: 고통의 형이상학

내게는 고통밖에 없습니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고통은 내게 충실했고,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내 영혼이 심연의 바닥을 헤멜 때에도
고통은 늘 곁에 앉아 나를 지켜주었으니
어떻게 고통을 원망하겠습니까.
아 고통이여, 너는 결코 내게서 떠나지 않겠기에 나는 마침내 너를 존경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이제 너를 알겠다. 너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아름답다는 것을.

프랑시스 잠, <고통을 사랑하기 위한 기도>

도시는 편재한다.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우리의 존재가 코기토로써 정의되는 한, 도시는 그 속에 수많은 구조의 실을 뻗어 넣어가면서 우리의 인식을 구성한다. 많은 이들이 목가적인 삶에 대한 열망을 품고 도시를 탈출하려 노력하지만, 날 때부터 도시에 길들여진 인류는 외곽에서 오래 생존하지 못하고 게눈 감추듯 사라진다. 더구나 외곽으로 탈출하는 것이 도시로부터의 해방이 될 수도 없다. 외곽은 그곳이 도시가 아니기 때문에 외곽인 것이다. 따라서 외곽의 정의는 도시의 그것에 완전히 의존한다. Project Moon은 우리의 집단무의식 속에 구성된 이러한 도시의 개념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낸다.

세계관 속 도시는 어떤 특정 국가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 의식이 닿는 범주 속의 세계 전체를 다루기 위해, 많은 부분들을 추상화하고 상징화한 것이다. 날개, 머리, 손가락들. 물론 이러한 은유 자체는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보통명사들의 향연과, (아마도) 의도적으로 뒤섞이고 흐려져 있는 국가/문화적 요소들은 이것이 하나의 가능 현실이라기보다는 모든 현실에 대한 일반의 상징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이 도시는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세계인 동시에 그 어떤 세계도 아닌 것이다. 다르게 말해 보자. Project Moon이 그리는 도시는 인류 역사의 모든 도시에 대한 공리 기하학적 묘사이다.

보르헤스

<로보토미 코퍼레이션> 당시에도 그러한 공리적 묘사는 존재했지만, 그것이 기존의 다종 다양한 문학들과 적극적으로 연결되기 시작한 것은 역시 텍스트에 대한 묘사가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는 <라이브러리 오브 루이나> 부터라고 해 두어야겠다. 이 때부터, 전작에서 무대 장치에 불과했던 도시는 현실의 수많은 텍스트로 그 가지를 뻗어 나가며 주인공의 자리에 등극한다. 그러한 점에서, 도서관의 모티브로써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 을 선택한 것은 더할 나위 없는 마술적 사실주의의 침투라고 해 두어야겠다. 계속 확장되는 도서관은 어떠한 궁극의 책을 지닌다. 하지만 바벨의 도서관이 그렇듯이, 궁극의 책 자체는 이 세계에서 그다지 큰 비중을 지니지 않는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타자화된 의식, 로고스, 신의 존재와 같은 우리의 욕망에 대한 은유인 것이다. 따지고 보면 힐베르트의 호텔 같은 곳에 모든 문자의 조합이 존재한다고 가정해도, 그 시점에서 가장 큰 수수께끼는 궁극의 문자열보다 그 호텔 자체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또 한 번 세계 자체를 대면하게 된다.

굴레를 끊어내며, 공포를 직면하는 눈

Project Moon이 세계 자체를 묘사하는 방식은 매우 정직하다. 정직하다 함은 눈을 돌리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으로부터 눈을 돌리지 않는가? 이 경우에는 편재하는 고통으로부터다. 도시는 다소 작위적일 정도로 노골적인 부조리와 고통, 무의미한 죽음들로 흘러넘치고 있다. 매 순간 도시에 흘러 넘치는 시산혈해 속에서 뒤틀린 것들이 춤춘다.

그런데 이렇게 가감 없이 묘사되는 인간의 고통들은 작중에서 해결되지 않는다. 명쾌한 해결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분명 존재했다. 일례로, 로보토미의 카르멘이 그렇다.

로보토미 코퍼레이션, <백야>

여기에도 상징화된 무언가가 있다. 그녀는 연구소에서 빛의 씨앗을 발아시키고 도시에 그것을 흩뿌려 노출시킴으로써 구원을 추구한다. 그녀를 위시한 로보토미는 프로메테우스를 내세운 형이상학적 십자군이 된다. 하나의 과학적 방법론을 정립하여 도시 속 절망의 인류에게 마법과 같은 탈출구를 제시한다. 그런데 시리즈 전반에 걸쳐, 이 해결책은 결코 완전히 실행되지 못하며 번번이 누군가에게, 무언가에 가로막힌다. 이것이 작중에서 굴레 의 개념이 가진 특성이다. 그것은 세계가 해석에 저항하는 힘의 매개체이다. 카뮈는 인간이 그 이길 수 없는, 강대한 힘을 마주하면서 끊임없이 반항하는 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고 주장한다.

모든 에피소드, 작품의 엔딩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들이 묶여 있는 굴레를 해결하거나 해소하게 되지만,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다른 누군가는 비극을 맞고 새로운 굴레가 태어난다. 도시의 머리였던 사서 비나를 상징하는 문구인 굴레를 끊어내며, 공포를 직면하는 눈 은 영문판에는 "the eye facing the fear, breaking the cycle" 로 번역되어 있다. 이것을 시계열 순서로 이해하기보다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두 가지를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즉, 공포를 직면하는 것이 곧 굴레를 끊어내는 행위라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스토리텔러로써의 Project Moon을 상징하는 경구라고 생각된다. 철학의 층의 지정사서인 비나는 이와 같이 저자의 말을 대언한다.

"epoché. 날 있는 그대로 보려무나. 그동안 학습한 무엇에도 얽매이지 말고 나를 보렴."

만약 당신이 이러한 주장에 동의한다면 다음의 질문에 대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Q. 그 행위가 언젠가 결국 새로운 굴레를 만들어낼 것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굴레를 끊어야 하는가? A. 그렇다. 그것은 시지프의 바위이다. 인간의 아름다움은 굴러 떨어진 바위를 다시 굴려 올리기 위해 뚜벅뚜벅 비탈길을 내려가는 그 억센 발걸음에 존재한다.

"모든 건 반복할 거란다. 한 번의 굴레가 끊어졌다 해도 지금 이곳의 모든 사서가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하지만 굴레가 한 번이라도 끊어졌다는 것이 중요하지."

세계의 가장 밑바닥에서 흐르는 강

갖가지 은유들이 얽히고설켜 있는 이 세계관에서도 가장 큰 정보량을 잠재하고 있는 개념은 아마도 "세계의 가장 밑바닥에서 흐르는 강" 일 것이다. 이것만큼 모든 것이 불분명하지만 그 존재가 확실한 것은 없다. 이것은 블루 아카이브 속 설정인 색채, 또는 초기 타입문 작품에서 묘사되는 근원 을 닮았다. 스피노자라면 이 강을 자기원인 (causa sui) 으로 지칭할 것이다. 그리스인들이라면 이데아로 묘사할 것이다. Project Moon이 그리는 이 세계관의 소실점에는 명백하게 러브크래프트적인 공포의 철학이 꿈틀거리고 있다. 어째서일까? 존재론의 논리적 귀결을 되짚어 올라가다 보면, 결국 어떠한 시작점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시작점을 상상할 때 본능적인 공포를 느낀다. 왜냐하면 그 시작점은 원근법의 소실점이기도 하며, 그것에 완전히 도달했다는 것은 이야기의 끝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또한 당신은 그 자기원인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도 가지지 않는 그 무엇일지 몰라서 두려워한다.

우리는 그 적절한 예시를 보르헤스에게서 다시 한 번 찾을 수 있다. 보르헤스의 단편 <바빌로니아의 복권> 에는 인간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복권이 등장한다. 모든 것의 우연을 긍정함으로써 필연을 손에 넣는 이 구조는 도시의 조직 검지 가 만들어낸 신, "방직기" 를 통해 재생산된다. 검지의 조직원이자 전령인 얀 비스모크는 다른 모든 조직원들처럼 하향식으로 전달되는 수많은 정체 모를 지령들을 지속적으로 수행하던 도중에 방직기의 진실을 알게 된다. 그것은 도시의 모든 소음과 진동을 특정 규칙에 따라 코드화하고 언어화하여 지령으로 바꾸는 장치다. 과거의 필연적 사건들을 미래의 우연적 사건들과 촘촘하게 엮어내는 그 기계만큼 방직기의 이름이 걸맞는 것은 없으리라. 얀 비스모크는 자신이 신으로 섬기던 것, 곧 자기 행동의 모든 최초 원인이 우연에 의존한다는 것을 별로 기뻐하지 않은 듯하다. 그는 그것을 깨달은 직후에 뒤틀려 버린다. 이때 프루스트의 홍차 한 잔만 했어도 그럴 일은 없었을 텐데, 하고 생각할 법도 하지만, 극심한 고통은 향기 또한 마비시키는 법이다.

뒤틀림

이 뒤틀림 ("도시의 인간들이, 갑자기 인간이라고 여길 수 없는 이형의 존재로 변하는 현상") 은 도시가 제시하는 철학적 자살의 상징적인 방법이다. 자신을 완전히 타자화하고 사물화하여 도시의 신체적 기관이자 현상이 된다. 부조리의 '기이한 삼위일체' 라는 부등식 중 한 항인 인간을 파괴함으로써 문제를 없던 것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방법론적 회의를 통해 최종적으로 남긴 단 하나의 확실성은 '의식(코기토)'이다. 카뮈에게 의식에 해당하는 유일한 '확실성' 은 바로 부조리다. 그 개념은 ‘진리 가운데서 가장 첫째가는 것’이며 '추론을 유발시킨 자명함 자체'다. (<시지프 신화> 역자 후기, 김화영)

작중에서 이 현상의 원인이 되는 코기토는 현실의 의식 (코기토) 의 개념을 상회하는 초월적인 물질이다. 여기서 언뜻 모순이 발생하는 듯이 보인다. 철학적 자살은 부조리, 공포와 직면하는 것을 포기하고 구원 등의 철학적 죽음으로 비약하는 것이다. 카르멘은 코기토를, 세계의 가장 밑바닥에서 흐르는 강으로부터 그 본질적 무언가를 길어 올리기 위한 두레박으로써 사용한다. 그런데 본질을 마주하는 행위가 어떻게 철학적 자살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이야말로 부조리를 마주하는 인간 본연이 아닌가?

이것은 E.G.O (Extermination of Geometrical Organ) 라는 작중 무기/이능력의 존재, 그리고 비나와 호크마의 존재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E.G.O를 개화하는 것과 뒤틀리는 것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작중에서 설명된다. 양쪽 전부 빛의 씨앗의 미덕에 불완전하게 노출된 이들에게, 코기토를 매개체로 일어나는 일이다. 세피라들 (카발라의 개념들이고, 로보토미의 관리자들이며, 도서관의 사서들이다) 로 대표되는 그 미덕들은 다음과 같다.

  • 말쿠트, 똑바로 설 수 있는 의지
  • 예소드, 분별할 수 있는 이성
  • 호드,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희망
  • 네짜흐, 삶을 이어나갈 것이라는 용기
  • 티페리트, 존재의 의미에 대한 기대
  • 게부라, 지켜내는 용기
  • 헤세드, 기꺼이 믿으며 맡길 수 있는 상대
  • 비나, 굴레를 끊어내며 공포에 직면하는 눈
  • 호크마, 과거를 받아들이며, 미래를 창조하는 눈
  • 케테르, 생각하는 나

이들 중 두 가지 , 비나와 호크마가 있다. 두 눈은 끊어내기 창조 라는, 미덕들 중에서도 가장 높은 능동성과 기투성을 가지고 있다. 도서관에서의 그들은 각각 철학의 층과 종교의 층의 지정사서들이다. 이 중 저자의 시점에서 자주 말하는 비나에게 다시 집중해 볼 필요가 있다. 캐릭터로서의 비나 본인은 LoR의 주인공 롤랑과 프랑시스 잠의 <고통을 사랑하기 위한 기도> 로 문답을 교환한다.

비나: 아 고통이여, 너는 결코 내게서 떠나지 않겠기에 나는 마침내 너를 존경하기에 이르렀다.
롤랑: …나는 이제 너를 알겠다. 너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아름답다는 것을.

또한 비나는 과거 로보토미 코퍼레이션의 시점에서도 이 시를 인용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보아 우리는 비나의 가치관이 고통의 수용, 공포에 대한 직면,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긍정을 통한 굴레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사이토 다이치와의 인터뷰 (https://news.denfaminicogamer.jp/interview/240917j_jp) 에서 언급된 Project Moon의 대표 김지훈의 가치관과도 어느 정도 유사하다.

이 세상은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잔혹한 세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물을 비뚤어진 시각으로 보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간 사이의 관계도 일시적으로는 좋은 관계가 될 수 있겠지만, 이해관계에 따라 곧 배신당할 수도 있고, 외로운 곳에서 버림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세상 속에서도 따뜻함이나 사랑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하지만, 믿을 수가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제 세계는 이렇게 상반되는 감정들이 뒤섞인 세계입니다.

이런 점에서, 뒤틀림이 시사하는 본질에 대한 직면은 E.G.O와 비교했을 때 중대한 차이이자 함정을 품고 있다. 왜냐하면 그 맥락에서의 본질은 기본적으로 더 이상 생동하지 않는, 한때 본질이었던 것에 대한 정물 사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세계의 근원, 색채, 자기원인, 그 무엇으로 부르든 간에, 본질을 (물리학도들이나 컬트 교주들이 그러듯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이미지로 고정하고 신봉하는 것은 오류를 낳는다. 뒤틀림은 그 오류가 축적된 결과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것은 본질을 마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부조리를 생략했다는 점에서 심각한 논리적 비약이 발생하여 교조적인 신념으로 추락하는 것이다.

그와 상반되게, E.G.O의 발현 조건으로 추측되는 것은 그 모든 것 에 대한 긍정을 추구하는, 니체의 디오니소스적 긍정과 의지의 철학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E.G.O를 발현하기 위해서는 대략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1) 지금 인식되는 현실, 결과, 조건,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마주하며 긍정할 것. 그리고 2) 그 속에서 발견되는 부조리와 싸우려는, 경이로운 수준의 투지를 가질 것. 이때 강물을 길어 올리는 두레박으로써의 코기토는 더 이상 자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 아닌, 그것을 지닌 인간의 목적에 봉사하는 도구로써 작용한다.

카르멘과 아인은 코기토를 사용해 길어낸 미덕을 모두에게 주입하여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주장했지만, 사람다움이란 대체 무엇인가? 현재, 오직 현재 상황의 총체만이 사람다움을 규정한다. 물론 이들이 이렇게 대담한 오만을 보이는 것조차 사람다운 것이다. 아니, 오히려 가장 사람답다고 해야 하겠다. 그들의 행위가 있었기에 극중 인물들은, 우리들은, 극복해야 할 무언가를 손에 넣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인간이 아닐 것이다.

“비명을 더 크게”

숲으로 들어가라고, 어떤 사상가들은 말한다. 도시의 많은 주인공들도 구원과 같은 해결을 추구했다. 물론 그것은 좋은 해결책이다. 필자도 마음만 같아서는 그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들이 생각하는 숲 같은 것이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도시는 편재한다. 당신은 숲으로 도망쳤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곳은 사실 도시가 그런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 둔 (남겨 놓은) 테마파크이고 숲의 시뮬라크르다. 보드리야르는 다음과 같은 선고를 내린다. "저항해야 합니다. 그 길밖에 없습니다. 뒤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전통적인 인간주의, 변증법적 역사, 전통적인 가치로 되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세계화를 통해 이런 것들은 이미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로보토미부터 림버스에 이르기까지, 이 도시에 총체적인 구원은 없다. 개개인들의 투지와 성장이 엿보일 뿐이다. 현대의 많은 이야기들이 사회에 대한 교조적인 교훈들을 항상 내포하는 것과 비교되는 점이다. 우리의 도시 이야기의 미덕은, 그보다는 오히려 그리스 신화의 관조성을 닮았다. 이것은 전체를 긍정하면서도 투지를 놓지 않는 이들을 위한 일종의 유효한 전략을 제공한다. 보드리야르를 한 번 더 인용하면, 이것은 "체계에게 자기자신의 논리를 다시 배가하여서 되돌려 보내는 것이며, 마치 거울처럼 의미를 흡수하지 않고 되돌려 보내는 것과 등가이다." 이것이 바로 이야기꾼으로써 Project Moon의 전략의 골자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들이 구축한 거대한 도시. 강물. 호수. 뒤틀림들. 이는 플레이어들의 현실 세계에 휘몰아치는 거대한 비명이며, 그렇기에 그 비명의 음조에는 우리에게 희망의 여지를 주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이쯤에서 마치도록 하자.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인생이라고 하는 것뿐입니다.
ー 열대 (2018), 모리미 도미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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