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성 간단 해체
이렇게 시작해 보자.
긍정성은 21세기 최고의 독성 물질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긍정적 사고방식" 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을 때 21세기는 훨씬 행복했을 것이다.
문장을 써놓고 보니, 이번 글에는 현학이, 그러니까 암호화가 부족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왜냐하면 필자 본인이 긍정성의 폭력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글은 편향될 운명이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의지가 없는 글 또한 존재하기 힘들다. 그러니 여기서는 긍정성에 대한 필자의 반감을 긍정하기로 하자.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글이 진행되지 않으니 말이다.
보이는가?
이런 도입부야말로 긍정성의 흔하고 조잡한 패턴의 예시다. 그것은 언제나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된다.
그러니 같잖은 실험은 집어치우고 이 텍스트는 그저 「폭력의 위상학」에 바치는 독자적인 해석을 담은 산문 정도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애초에 /긍정성/ 은 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무언가 옳다, 좋다, 괜찮다는 의미 같다. 그런데 물론 이 말에는 대응될 수 있는 여러 가지 계보적 요소가 있다. 대략 시대순으로 나열해 보자.
- κατάφασις -- 논리학에서의 긍정 명제. 논리학적 긍정의 원류.
- Affirmation – 어떤 사실이나 신념을 긍정하는 것. 어원: 라틴어 affirmare.
- Positivität – 부정성에 대한 변증법적 비판으로써의 긍정성. 어원: 라틴어 positum.
- Positivity – 태도, 감정, 분위기 측면에서 긍정적인 성질. positive + -ity, 주로 18~19세기 이후 형성.
자, 이렇게 온갖 가지 개념이 긍정과 엮여 있는데, 상술한 "긍정적인 마인드" 는 어디에 속할까? 아마도 positive thinking이 서구권에서 유행할 때 자연스레 그리 번역되었을 것이다. 요는 가장 최신 유행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놓고 봐도 뭔가 이상하다. Positivity가 긍정적인 성질로 번역될 수 있기는 할 것이다. 그런데 영한사전을 보면 "긍정적인" 뿐만 아니라 "낙관적인" 도 함께 딸려 온다. 그럼 낙관은 또 뭐란 말인가? 국어사전에는 "인생이나 사물을 밝고 희망적인 것으로 봄", 또는 "앞으로의 일 따위가 잘되어 갈 것으로 여김" 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긍정" 의 경우 무엇을 긍정하겠다는 것인지 가 명시되어 있지 않아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반면, "낙관" 은 "앞으로의 일" 이 잘되어 갈 것이라는, 비교적 명확한 대상과 프로세스가 존재한다.
그러니까 결국 긍정적 사고방식이란 "앞으로의 일 따위가 잘되어 갈 것으로 여기는 사고방식" 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러면 원래부터 "낙관적 사고방식" 이라고 번역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번역한 이를 탓하기만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어 또한 낙천주의를 위해 단어 "optimism" 을 버젓이 준비해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굳이 positive thinking 같은 괴이한 개념이 생겨난 것은 어째서일까? 여러 해석이 분분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나는 다음과 같은 가설을 제시하고 싶다.
그것은 개념 자체를 항진명제로 만들어서 "옳은 것은 대체로 옳은 것이다" 같은 조악한 자기 긍정 기계로 만들기 위한 발명품이다. 다르게 말하면, 이 개념 속에서 논리적 긍정과 낙관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는데, 그 자체가 특수한 목적을 지닌 언어학적 오실레이터 같은 기관이라는 것이다.
처음으로 "긍정적 사고방식" 이 좋은, 옳은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주장할 때, 여기서 "긍정" 은 "앞으로의 일이 잘되어 갈 것" 이라는 의미, 즉 낙관이다.
두 번째로 누군가가 이 사고방식을 비판했을 때, 여기서 "긍정" 은 방금 말한 낙관적 명제가 참이라는 것을 강제하기 위해 쓰인다. 그러니까 긍정적 사고방식은 바로 이 논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자체도 포함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면 당연히 논리는 엉망진창이 되는데, 분명히 첫 번째 맥락에서 "긍정" 이란 낙관의 의미로써 쓰이는 것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굳이 비슷한 논리를 끌어다 쓰자면, 더글러스 애덤스의 무한 불가능 확률값 추진기 정도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 환상의 논리 기계가 있다면 은하 대통령 자포드 비블브락스는 우주와 시공간을 넘어 어디에든 원하는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되니까 말이다. 긍정주의자들이 그러한 초월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을지 선택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독자 제현에게 맡겨진 일이다. 일단 얼 그레이 한 잔을 마시고 고민해 보는 것을 추천한다.
그는 생각했다. 만일 그런 기계(무한 불가능 확률값 추진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면, 그건 논리상 '제한적으로' 불가능한 확률이 되어야만 했다. 그렇다면 그런 기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게 정확히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를 계산해내서, 그 수치를 제한된 불가능 확률 발전기에 집어넣고, 거기다 진짜 뜨거운 차를 한 잔 새로 타서 집어넣는다……그러고는 기계를 돌리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했다. 그러고는 그렇게 오랫동안 바라 마지않았던 귀중한 무한 불가능 확률 발전기를 자신이 홀연히 발명해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훨씬 더 놀라운 일은 그가 은하 연구소에서 엄청나게 똑똑한 자에게 주는 상을 수상한 직후에 벌어졌으니, 존경해 마지 않는 물리학자 폭도들에 의해 그가 린치를 당했던 것이다. 물리학자들은 마침내 자신들이 정말로 참을 수 없는 유일한 것이 똑똑한 녀석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이걸 보면 낙관의 정의 속에도 불명확한 변수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누구의 일이 잘되어 갈 것인지가 명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인류 전체의 일인가, 화자 본인의 일 (특정 단체 및 국가의 일도 마찬가지다) 인가? 인류 전체의 일인 경우,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설파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이미 모두의 일이 잘되어 갈 것이 예정조화마냥 정해져 있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굳이 힘들게 긍정의 교리를 외치지 않아도, 모든 것은 잘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한 긍정의 설파는 대체로 그 표어와 다르게, 화자 본인이나, 본인이 취사선택한 인간들의 그룹에 그 대상을 한정한다. 그리고 선택받지 못한 그룹은 사실상 절대 악으로 분류되며, 그렇게 부분-전체-긍정의 프랑켄슈타인 같은 논리는 미쳐 날뛰면서 세상을 전부 마니교적 선악 대립으로써 규정하고자 한다. 낙관론의 가면을 쓴 마녀 사냥, 양의 탈을 쓴 늑대인 것이다 (어떤 소설 속 공화국의 주장이 떠오른다. "그 전장에, 죽은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무인병기 속에 탄 파일럿들은 그들에게 있어서 인간이 아니니까).
한병철은 긍정성의 과잉에 대해 분석한 가장 유명한 철학자일 것이다. 그는 "오늘날 주체는 자신을 자유롭다고 믿지만, 실은 자유롭게 착취당하고 있는 존재다." 라고 말한다. 긍정성에 세뇌당하여 자신에게 제시되는 온갖 잡스러운 테제들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병철은 그러한 긍정성의 문제를 자각한 개인이 그것을 거부하기 시작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대중 사이에 만연한, 자기 착취의 안개를 발생시키는 개념적 미노타우로스가 라비린토스 안에 똬리를 틀고, 낙오에 대한 암묵적 공포뿐 아니라 암묵적 집행 또한 실현시키고 있다는 내용이 빠져 있는 것이다.
물론 예전과 같이 모든 이들에게 국가적 감시와 처벌의 폭력이 만연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중에 만연해 있는 신자유주의적 공포는 이제 더 없는 상상 속 미노타우로스를 실체화하여, 제물을 바칠 대상이 없어도 알아서 동조압력을 구사한다. 사회적 통념과 성장 및 자기계발적 서사를 따르지 않는 이들을, 그 친구와 가족들을 해마다 사회적으로 고문하고, 추방하고, 인신공양의 제물로 삼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한병철의 "자유롭게 착취당함" 은 거시적으로는 분명히 옳은 말이지만, 그 착취를 거부하려 하는 이들 개개인에게 있어 그것은 전혀 자신의 선택이 아니다. 그렇게 말하도록 강제되고 있을 뿐이다.
재독 철학자인 한병철이 동양에 현재진행형으로 만연하고 있는 이러한 미궁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추측해 보자면, 지금은 자각의 작업 자체가 당면 과제라고 생각해서일 수도 있고, 그 너머의 괴물을 아직은 언급할 때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닐까? 어쨌든 그러한 담론은 다음 단계의 사유하는 인간들에게 맡겨진 것으로 생각된다.